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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모란 거시기,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by 뿔란 202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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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저작권위원회)

 

항간에는 김영랑이 무용하는 최승희와 헤어진 아픔을 잊지 못해

오래 오래 잊지 못해

헤어지고도 몇 년이 지난 1934년에 

최승희에 대한 사랑을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아름답게 표현했다고들 한다.

 

최승희, 화랑무

 

사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일은 아니다. 

문학이라는 게, 창작자의 마음과 생각만이 중요하다면 굳이 

읽어제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학은 창작자의 마음과 생각을 넘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수 없이 많은 세계를 만들 수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문학>, 1934-

 


시의 내용은 참 알뜰하고도 단순하다.

모란이 피기 전에는 나의 봄이 아니다.

모란이 떨어지면 봄과는 빠이빠이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3행의 '비로소'이다.

(시를 어려워하는 분들에게 시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사소해보이는 조사, 어미, 부사 등을 대충 넘기고 나면

'뭐라는 거냐?'

싶은 감상만이 남을 것이다.)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긴다면

누가 봐도 아무래도 봄음 여읜 설움에 잠기기를 내심 기다려온 사람의 말이다.

이제 드디어, 비로소 설움에 잠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마저 시들고 이제 모란은 없어졌다.

모란꽃은 화자의 보람이었건만.

게다가 화자는 모란이 지면 그뿐이로 

한 해가 다 가버린다는 것이다.

모란이 지고 난 뒤, 다시 모란이 피기까지

일년에서 조금 빠지는 그 긴 시간은 화자에게 없는 시간, 삭제된 시간이다.

그 인생에서 삭제된 360일 간 화자는 그저 울고만 있다는 것이다.

(모란은 대개 5일간 꽃을 유지한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화자는 다시 모란이 피기까지,

그 삭제된 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여기서 찬란함은 모란이 피어서, 모란이 아름다워서 찬란할 것이고,

슬픈 것은 모란이 지기 때문에 슬플 것이다.

그리하여 모란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봄은 찬란하며 슬픈 것이다.

 

그러나 '찬란한 슬픔의 봄'은 그뜻만 갖는 것은 아니다. 

슬픔 자체가 화자에게는 찬란한 것이니,

앞의 3행의 '비로소'를 보자면 

화자는 슬픔 자체를 기다리고 원하고

슬픔에 푹 빠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니,

어째서냐? 슬픔이 찬란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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