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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서정주, '자화상'

by 뿔란 202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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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문득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ㅎ

정확히는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라는 구절이 입끝에서 맴돌더군요.

 

뭐.... 우리가 말이죠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좋은 제안을 받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나를 좋아해주고

누군가는 별다른 이유 없이도 나를 싫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는 구절은 글쎄요

그런 거절이나 미움을 그냥 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닐까요.

 

대표적인 친일 시인으로 독재 정권에 부역한 시인으로도 유명한

서정주 시인, 그러나 시만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빛을

뿜어내는 듯 합니다.

 

뭐.. 참고로 말이죠 이 시의 화자는 서정주 시인 자신은 아닙니다.

서정주 시인은 유복한 집에서 성장했다니까요

아버지가 종이고 외할아버지가 갑오 농민 전쟁에서 돌아가셨다는

화자와는 거리가 멉니다만,

그래도 시가 힘이 있는 건 시적 진실이 있어서겠지요.

 

사실 전 늘 마지막 연을 읽을 때면

 '아 이 양반 오바하시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연의 단어 하나 하나가 문득 부끄러울 만큼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튼 이 시 외워두시면 종종 기분 우울한 날 되뇌어지는 좋은 시로

머릿속에 저장해두시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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