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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전문, 해설]

by 뿔란 2021.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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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아깝디 아까운 시인, 기형도 시인이 1989년에 쓴 작품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시간 개념에 미약하게 혼란이 옵니다. '아주 오랜 세월에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가 '이 종이를 떨어뜨'릴 거라는 건....... 지금 화자가 어느 책에 종이를 끼워넣었다, 혹은 끼워넣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겠죠. 책에 끼워넣는 종이는 '이 종이'.... 그렇다면, '이 종이'는 지금 화자 앞에 있는 종이일 테니까... 아마, 이 시를 쓰고 있는 종이겠네요. 네.. 화자는 시를 쓰면서, 이 시를 쓴 종이가 먼 미래의 어느 날 책에서 툭, 떨어질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도대체 왜 시를 써서 책에다 끼워놓으려고 하는지도 궁금하네요. 혹 기형도 시인 습관? 아니면 시 내용상 부끄러워서?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자, 1~2행에서 미래에 이 시가 쓰인 종이가 발견될 날을 예고해 놓고, 3행에서부터는 현재를 미래의 눈으로 바라보고 말을 합니다. 그런 시선인 거 느껴지시나요? '그때'란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현재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미래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그때'라고 말하게 된 거죠. '마음'이 세운 '공장'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생산하는 공장일까요? '기록할 것이 많았'다의 원인이 공장인 거, 읽히나요? 마음이 세운 공장은 생각을 생산하는 모양입니다. 종이에 기록할 생각을 생산하는 공장, 그런 공장은 마음이 세웁니다. 

 

 마음이 너무 많은 생각을 뿜뿜 뿜어내는 현재의 화자는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할 일 없고, 마음이 안주하지 않았고, 좀 허황된 느낌... ... '공중에서 머뭇거'리는 시절을 지금 화자는 살고 있나 봅니다. 

 

 '가진 것'이 '탄식 밖에 없'는 젊은이, 생각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젊은이, 공중에서 머뭇거리는 젊은이가 바로 화자인 건데요.... 우리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늘 '탄식'만 한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화자는 '가진 것이 탄식 밖에 없'어서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었다는데요..... 자, 탄식 말고 다른 게 있으면 저녁거리에 물끄러미 서 있지 않고 다른 어떤 일을 했다는 이야기겠죠..... 여기서 '탄식'은 좋은 거? 나쁜 거? 세상이 글러먹어서 당연한 거? 어떻게 보이시나요?

 

 화자는 저녁거리에 물끄러미 선 청춘입니다. 자기 자신을 저녁거리에 물끄러미 세워 둔 젊은이인 거죠. 살아온 날들을 세어보고, 누구도 나를 두려워 하지 않는.....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좋은 걸까요? 내가 평화적이라는 뜻? 아니면 나는 우스운 인간이었다는 뜻? 탄식만 하는 인간이니까?

 

 

 자, 이 시의 주요 대상은 화자 자신입니다. 화자의 질투라고 해도 좋겠고요. 

 

이제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어떤지 느껴 볼까요?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젊은 화자가 가진 희망이란 오직 '질투'뿐.......... 아, 왜 탄식만 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질투는 보통 안 좋은 의미로 쓰이죠. 네, 그 안 좋은 의미 그대로 이 시에서도 쓰였네요. 화자는 자기 자신을 성찰, 반성하는 중입니다. 희망의 내용이 질투인 건, 다른 좋은 거 1도 없었다.... 이런 결론 ㅜㅜ

 

 자, 내 청춘은 남들을 향한 질투와 그로 인한 탄식,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 이런 고백을 하면서, 화자는 짧은 글을 씁니다. 맨 처음에 나왔던, 책갈피에 끼울 '종이'에 쓴다는 거겠죠. 뭐라고?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네....... 이 부분은 기형도 시인에 대해 퀴어 문학쪽에서 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해석해도 완벽하게 해석이 됩니다만.... 시인의 개인사를 고려하지 않아도 완벽하죠.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질투하며 탄식하는 걸로 삶을 채우지 않으니까,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맞고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행위는 질투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기형도 시인의 시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쓴 박찬욱 감독 영화 '질투는 나의 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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