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패러디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내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김춘수 시인의 '꽃'은 패러디 시가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그 많은 패러디 중에 먼저 오규원 (1941~2007) 시인의 '꽃의 패러디'를 볼까 합니다.
1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는 아무 의미도 없고, 존재랄 것도 없는, 그저 기다림이었답니다. 그는 그저 기다림일뿐이었는데, 그럼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화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다시 말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건, 그를 왜곡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 진짜,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그 차연, 의미가 미끄러지는 거!!! 아, 그렇다, 데리다!!!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의 미끄러짐, 그거랑 같은 말인 듯 합니다.... 물론 시를 읽는 데 꼭 데리다까지 데려 올 필요는 없겠습니다!)
아무튼, 이래서야 원.... 참, 이름을 불러주는 마음도 안타깝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듯 합니다. 이름을 호명하기 전에는 기다림에 불과한 존재, 이름을 호명당하면 본질이 왜곡될 뿐인 존재, 그런 존재가 우리들이고,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이름을 불러도 우리의 행위는 존재를 왜곡할 뿐이니까요. 욕심 없이 살겠습니다, 엉엉
2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말 잘 들으면 뭐하냐고요, 엉엉, 왜곡되는 거라면서요.... 엉엉
3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내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3연에서는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어떻게 모습을 바꾸는지 좀 더 자세히 알려줄 셈인 모양입니다만.....
아니, 그러니까, 풀, 꽃, 이런 거 아니고, 개밥풀, 인동, 이런 것도 아니고..... 이름을 불린 그는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는군요!!! 이런 거창한 녀석을 보았나! 뭘, 또 의미의 틀씩이나.... 아니, 그러니까, 의미의 틀도 결국 왜곡된 의미의 틀.... 엉엉
4연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이름을 정하고(명명) 싶어합니다. 서로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각자의 의미의 틀을 완성하고 싶어합니다. 비록 왜곡된 것이지만.... ㅜㅜ 하지만, 그 왜곡으로 인해 언제까지나 슬퍼할 필요는 없겠네요. 의미의 틀이 완성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기다림이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의미의 틀을 만들고, 그러나 언제나 그것은 왜곡된 것일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또 다시 새롭게 의미의 틀을 만들고, 그 역시 왜곡된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또 새롭게 의미의 틀을... 그래봤자 왜곡.... 굴하지 않고 또..... 이것은 정말 시지프스의 신화네요.
결국, 이 시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우리는 진실, 진리, 진짜 본질을 잡을 수 없지만, 그것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
오규원 시인이 즐겁게 읽고 이런 패러디를 했을,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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