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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전문, 해설] 김광균, 광장

by 뿔란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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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김광균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일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되어 조으는 가등,
소리도 없이 모색에 젖어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좇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1930년대에 우리나라 문단에서는 모더니즘이 대유행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은 일찌감치 산업화를 이룬 서구에서 현대의 산업화된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는 문예 사조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화, 자본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더니즘이 마음에 들었던 문학 청년들에 의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김광균(1914~1993)시인 역시 모던한 청년으로, 회화적인 시, 아니 그러니까 dialogue 그 회화말고, 그림 회화, 그러니까 시각적이고 주지적인 시를 주로 썼습니다. 회화적, 시각적은 쉽지만 주지적은 어렵다고요? 主知, 아는 게 주를 이룬다, 그러니까 감정보다 논리를 앞세운 시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아닌 저 같은 범인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도대체 어떤 논리냐.....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감정을 절제한다는 말은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김광균 시인은 때로 자신의 시학(시는 회화적으루다가....하는 시학)을 벗어나 은근슬쩍 감정을 표현하곤 합니다. 

 

김광균 시인의 첫 시집, <와사등> _ '광장'도 이 시집에 실려 있다.

 

 아, 아무튼 말이죠, 문학이 예술이지만 다른 예술에 비해 좀 의미, 내용, 논리, 주장, 이런 게 좀 중요한 편입니다. 언어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학 중에 그런 의미성이 가장 적은 것, 적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詩. 한자로 쓰면 더 있어 보일까요.... 아, 아무튼 말이죠, 시를 읽을 때 꼭 어떤 거창한 의미, 이거슨 시련이다, 이거슨 극복의지다, 이거슨 무엇이다, ............ 그런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모양과 색을 그려주면 모양과 색을 떠올리고, 냄새를 말하면 냄새를 맡고.. 그런 식으로 읽으시는 게 좋습니다. 

 

자, 그럼 다시 시를 조목조목 보면서 뭔 말을 하는지 쪼잔하게 알아보도록 해요.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방이 비어 있네요. 혼자 있는 방. 대낮이랍니다. 그런데 왜 거울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걸까요.... 체경이라고 했으니 벽에 전신거울이 걸려 있거나, 전신거울이 달린 좌식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런데 도시가 왜 슬플까요? 아무튼 슬픈 도시, 일몰이 옵니다. 해가 지고 있답니다. 시계파는 가게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가 있다네요. 완전 유럽 스타일 풍경 아닌가요? ㅎㅎ 그런데 이 청동 비둘기가 바람이 부는 날이면 구구 운답니다. 청동인데? 시니까요.....

대충 이런 느낌의 시계점? 

일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되어 조으는 가등,
소리도 없이 모색에 젖어

'일어선 고층'은 고층빌딩 모습이 벌떡 일어서 있는 듯 보인다는 의미 정도겠죠... 모더니즘 문학하는 양반들이 워낙 서구문물, 서구적인 느낌, 서구적인 단어를 좋아하셔서 고층 빌딩 데리고 오신 듯한데요, 고층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고층은 아닙니다. 한 5층 건물만 되어도 고층이라고 할 수 있겠죠, 1930년대 당시 기준으로는요.

 

응? 근데, 서걱이는 갈대밭? 

고층 빌딩 위에서 갈대밭이 서걱서걱,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고? 이것은 고층 빌딩위의 옥상 정원일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갈대밭인데?

 

네네, 갈대밭이 나온 건 고층 빌딩도 갈대처럼 길쭉하니 생겨서, 고층빌딩들이 쭉쭉 모여 있다, 이런 정도로 시각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걱인다는 건 고층빌딩들이 화자에게 주는 느낌이겠죠. 서걱서걱.......

 

'가등'은 가로등인데요, 열없는 표목이 되어 졸고있답니다, 가로등이요. 표목(標木)은 '무엇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우거나 박은 말뚝.=푯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살짝 '목'자의 한자를 바꿔주면, '표목(標目),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지향하는 실제적 대상으로 삼음. 또는 그 대상.=목표' 가 되거든요. '열정 없는 목표가 되어 졸고 있는 가로등'하면 한결 그럴싸해지네요.

 

너무 자의적인 해석일까요? 그럼 시구에 충실하게 다시 봅시다. 가로등이 고장나서 불이 안 들어 오면 열이 발생하지 않겠죠. 불이 안 들어오는 가로등은 의미 없는 말뚝에 불과하겠고요. 

 

 고층 빌딩들이 서걱이는 거리, 가로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아 차갑고 의미없는 말뚝이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모색에 젖어'.... 아니 또 무슨 거리가 조용하다는 건가요? 그런 것 같네요. 아무튼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모색, 저녁 빛깔에 젖어들어 갑니다.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좇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그렇게 도시의 저녁이 깊어 가는데, 화자는 엷은 베옷 차림이랍니다. 바람은 차가운데, 마음 한구석에서 벌레가 운답니다. 벌레가 마음에 들어있는 기분? 내 마음은 울고 있다? 내 마음 속에 벌레 같은 무언가가 있어서 울고 있다? 원하시는대로 읽읍시다, 우리.

 

아무튼 그런 상태인 채로 황혼을, 석양을 따라 사거리를 뛰어갑니다. 마음 속에 벌레가 울어대니 달음질칠 수 밖에 없었나 봅니다. 뛰어나온 곳이 넓은 광장. 세상은 '소리도 없'고, 나는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 있답니다. 모자가 없는 게 굳이 말해야 할 일일까요? 베옷 차림에 모자가 없는, 도심 한 복판에 선 남자. 모자가 있으면 더 잘 차린 차림새, 외출용, 품위와 체면을 지킬 수 있겠죠. 그러나 화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헐벗은? 혹은 좀더 꾸밈없고 가식없는, 헐벗은 자기 자신 그대로인 채, 도시 한 복판 광장에 서 있답니다. 

 

화자가 그런 기분이라네요. 그저 그렇다니 우리도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인 거죠, 뭐... 

 

처음엔 얌전히 거울 앞에 앉아 있던 양반이 베옷 차림으로 뛰어 광장에 섰네요. ㅎ

 

1930년대 초 종로 2가에서 바라본 종로 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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