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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해설,전문]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by 뿔란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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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갓집도 아닌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 시는 즐기세요. 화자가 말하는 것 고대로 상상하며 따라가세요. 아름다움이란 이런 거 아닐까요? ㅜㅜ

그럼 같이 가봅시다~!

 

1연

화자가 지금 있는 곳은 우리 집도 아니고 친척집도 아니고 고향도 아닙니다. 밤, 아버지의 최후의 밤입니다. 바깥엔 풀벌레 소리가 가득합니다. 여름밤이거나 초가을밤이겠네요. 날이 아직 더우니 창문은 열려 있을 겁니다. 창문마저 열려있으니 풀벌레 소리가 얼마나 요란할까요. 아버지의 최후, 임종의 시간인데 아버지는 침상도 없이, 그러니까 제대로 된 이부자리도 없이 누워 계십니다.

 

 

2연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노령, 그러니까 러시아를 다니면서 애써서 자녀를 키웠습니다.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밀수? 일제 강점기에는 워낙 살기가 힘들어서 사람들이 간도, 만주, 러시아, 일본까지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많이들 나갔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을 것 같네요.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키운 자녀들에게 유언 한 마디가 없으시네요. 아무을만에서 배가 부서졌던 것도 썰렁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는데요... 그런 위험하고 쓸쓸한 외국에서의 일을 완전히 잊는다는 건... 아무래도 이미 돌아가셨다는 뜻이겠죠. 목침을 반듯이 밴채.

 

러시아 지도© 2021 Copyright:  Newebcreations

 이 시의 아버지가 어디서 일하셨는지 봅시다. 위의 러시아 지도 오른쪽 아래를 보시면, sea of japan 이라는 망발이 있고요, 그 위에 위에  Ussurisk(우수리스크)가 있죠? 니코리스크가 우수리스크의 옛이름입니다.

 우수리스크에서 살짝 왼쪽 아래로 Vladivostok(블라디보스톡)이 보이시나요? 아무르만(아무을만)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만, 그러니까 육지로 쑥 들어온 바닷가입니다. 블라디보스톡 아래로 NORTH KOREA, 그러니까 북한이 있네요. 이렇게 우리나라랑 붙어 있는 곳이라 많이들 왔다갔다하며 일을 한 모양입니다.

 그 부분만 좀더 큰 지도로 다시 보죠.

 

Pk0001,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아무르만의 겨울바다_바다가 다 얼어서 자동차가 수면위로 다닌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692421
니코리스크

3연

아버지도 꿈이 있었겠죠. 그 꿈의 꽃봉오리가 아버지의 다시는 뜨지 못할 두 눈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손발이 식어가고 입술은 더이상 호흡이 없고 차갑게 검게 변합니다. 의원을 불렀으나 이미 돌아가셨으니 의원이 할 일이 없습니다. 의원이 돌아가고 그래도 이웃 늙은이가 화자의 가족을 도와주네요. 아버지 눈빛 속에 아직 남아 있던 빛(미명)이 낯을 덮고 사라집니다. 

 

4연

아버지를 제외한 남은 가족, 우리는 아버지 머리맡에 엎드려 울음을, 전부 있는 대로 다 쏟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우는데, 울고 났는데, 그 밤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1937년 간행된 이용악 시집 <분수령>
<분수령>에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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