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즐기는 자가 승자다 * 문학, 수능국어, 상식, * 고등국어, 수능국어 학습 및 과외 문의 freeerror@hanmail.net 카톡 smila4
  • 재미 없어도 재미 있고 싶다!
  • 불안한 만큼 흥미로운
문학, 전문과 해설/현대시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_ 전문, 해설

by 뿔란 2021. 5. 5.
반응형

김홍도_대장간_풍속화첩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어려운 시는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니 찬찬히 살펴 봅니다.

 

첫 4행은 '플라스틱 물건'을 꾸며주는 말입니다. 내가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를 말하면서, 플라스틱 물건이 화자에게 어떤 물건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첫 4행의 내용으로 보건대 플라스틱 물건은 가치가 없는 물건입니다. '제 손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싼 맛에 잔뜩 사는 물건. 쓸때도 아껴 쓰는 것이 아니라 마구 쓰고, 망가지면 휙휙 내다버리는 물건. 그것이 플라스틱 물건입니다. 그런데 문득 나 자신이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ㅜㅜ

 

그렇게 자신이 하찮다 못해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화자는 일단 버스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털보네 대장간으로 찾아갑니다. 물론 털보네 대장간은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아, 아무튼 대장간에서 나를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시퍼런 무쇠 낫이 되는 과정은 매우 강렬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야 합니다.

 

낫을 달구고 있는 대장간 풍경

무쇠 낫이 아니면 꼬부랑 호미가 되고도 싶습니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습니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호미나 낫은 고통스런 정성을 다해 손으로 직접, 고통스러운 과정을 하나하나 거쳐 만들어진 가치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 온통 부끄러워'질 때, 나 자신이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대장간에서 만든, 가치있는 낫이나 호미가 되어 걸려있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는 이해가 가겠지만, 왜 하필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이 등장하는지 궁금하신가요?

 

직지사 대웅전, By (c)한국불교문화사업단, culturalcorpsofkoreanbuddhism - 자작,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5172545

신라 눌지왕 2년, 그러니까 서기 418년에 처음 창건된 직지사는 사진처럼 매우 아름답고 점잖고 유서깊은 사찰입니다. 그리고 '해우소'는 절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단어입니다.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만... 지금이야 직지사 해우소도 매우 현대적입니다만....  아주 예전 진짜 쌍팔년도(사실 쌍팔년도는 1988이 아닙니다, 단기로 88년이라 1950년대를 뜻합니다.)까지만 해도 사용했을 전통 직지사 해우소는...  당연히 푸세식 화장실이었는데, 푸세식은 아래 깊이가 꽤 깊잖아요.. 그런데 직지사 해우소의 똥통은 깊이가 가장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적에 직지사에 가서 들은 이야기라 좀 헛갈립니다만.. 해우소 깊이가 무려 40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아찔한 높이를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의 심정은 어떨까요..  흔한 말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정도의 심정이 아닐까요. 바로 그런 심정일 때 화자는 대장간에 가서 걸리고 싶다네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