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시를 처음 읽은 건 초등학교 고학년때쯤?
그때부터 이육사의 시를 계속 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했듯.
이육사의 시는 참 묘하다. 조국, 민족, 독립, 왜정시대의 고통, 그런 것들로 점철되어 있을 듯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시는 미지의 것들에 대한 두근거림과 마음 속 고향을 완성하고픈 열망, 시인으로서의 예술적 동경과 야망, 그리고 로맨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섞여 있다.
고은주 작가의 장편소설 <그 남자 264>는 내가 시에서 본 이육사의 모습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준다.
작품의 스토리는.... 나 처음엔 실망할 뻔했다.
작품 속 화자는 2인이다. 처음 나오는 화자는 육사의 숨겨진 여인.
실제로 육사에게는 비밀의 여인이 있었다고, 육사의 절친이라고 할 신석초 시인이 말했다고 한다. 먼 발치에서 그 여인을 본 적도 있다고.
첫 화자인 육사의 숨은 여인은 육사 문학의 애독자이기도 하여, 뜸하고 심심한 연애의 빈 자리는 그의 글이 채워주다가,
이야기가 전환되면서 두 번째 화자가 나온다. 두 번째 화자는 첫 화자의 조카이다. 첫 화자가 나이를 먹은 뒤 육사와의 일을 글로 써 놓았고, 그 조카인 두 번째 화자가 그 원고를 받게 된 것이다. 조카는 원고를 들고, 육사의 외동딸을 찾아간다.
한국이 만들고 세계가 즐긴 명작드라마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의 한 구절에 의지한 사극이다. 중종이 말년에 병석에서 남겼다는 한 마디. "내 병은 여의(女醫)가 안다"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에서, 당시 임금을 진찰한 여자 의원이 있었구나, 어떻게 당시에 여자가??? 하는 의문으로부터 <대장금>이라는 긴 서사가 나왔다고 한다.
이 소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육사를 소설로 형상화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그 비밀의 여인을 사용한다. (이 로맨스가, 사랑하는 남녀로서 육사와 비밀의 여인이 더 생동감 있게, 애절하게 매력적으로 그려졌다면 물론, 이 소설은 엄청난 대중성마저 획득했을 것이다. 다만, 부작용으로 나 같은 약한 인간들은 육사 빠순이가 되었을 수도.....)
육사의 삶은 비밀의 여인뿐 아니라 많은 부분이 비밀로 남아 있다.
육사는 심심하면 한 번씩 감옥에 갔다 왔고, 중국으로 한국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며, 의열단의 일원이라는 소문에 쌓여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의열단은 그 구성원들도 다른 구성원을 모른다는 철저한 비밀의 단체이고, 당연히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명확히 남아 있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마음, 심정, 꿈은 짚어 볼 수도 있는 것인데, 그의 삶과 정신의 영토는 너무나 넓어 그 영토에서 자라난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 <그 남자 264>는 우리가 더 넓은 마음의 영토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어종이 가장 풍부한 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이육사의 영토는 바로 그러한 곳이니,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기본적인 한학 교육을 충실히 받은 동시에 일본 및 북경 유학생인 육사.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이면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생이자 의열단원인 육사.
전통과 현대, 예술과 전쟁, 그 모든 것을 다 한 몸으로 감싸고, 숱한 비밀을 홀로 안고 간 육사라는 사람, 그의 영혼과 영혼의 터전. 그곳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발굴되지 못한 아름다움과 깊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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