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에·1
기림 형.
인천 가 있다가 어제 왔소.
해변에도 우울밖에는 없소. 어디를 가나 이 영혼은 즐거워할 줄을 모르니 딱하구려! 전원도 우리들의 병원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이 아닙니다.
독서하오? 나는 독서도 안 되오.
여지껏 가족들에게 대한 은애(恩愛)의 정을 차마 떼기 어려워 집을 나가지 못하였던 것을 이번에 내 아우가 직업을 얻은 기회에 동경 가서 고생살이 좀 하여볼 작정이오. 아직은 큰소리 못하겠으나 9월 중에는 어쩌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소.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 일 저 일 의논하고 싶소.
고황(膏肓)을 든, 이 문학병을…… 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할 수 있는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化)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할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컨디션, 사표(師表), 시야, 아니
안계(眼界), 구속, 어째 적당한 어휘가 발견되지 않소만그려!
태원은 어쩌다나 만나오. 그 군도 어째 세대고(世帶苦) 때문에 활갯짓이 잘 안 나오나 봅디다.
지용은 한 번도 못 만났소.
세상 사람들이 다 제각기의 흥분, 도취에서 사는 판이니까 타인의 용훼(容喙)는 불허하나 봅디다. 즉 연애, 여행, 시, 횡재, 명성 ─ 이렇게 제 것만 이 세상에 제일인 줄들 아나 봅디다. 자, 기림 형은 나하고나 악수합시다.
하, 하.
편지 부디 주기 바라오. 그리고 도동 길에 꼭 좀 만나기로 합시다.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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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 [문학, 전문과 해설/이상] - 김기림에게 2 [이상, 편지]
김기림에게 2 [이상, 편지]
김기림에게·2 기림 형. 형의 그 구부러진 못과 같은 글자로 된 글을 땀을 흘리면서 읽었소이다. 무사히 착석 하였다니 (着席) 내 기억 속에 ‘김기림’이라는 공석이 하나 결정적으로 생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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