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정약용, 수오재기 [한글번역본, 해설]

뿔란 2021. 7. 11. 12:28
반응형

수오재기

 

수오재기, 제목의 뜻은 '나를 지키는 집에 대한 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기(記)'는 한문 수필의 일종. 
'수오재'는 守, 지킬 수 / 吾, 나 오 / 齋, 집을 뜻하는 재... .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의 '수오재'는 사실 정약용 큰형님네 집이름... 집이름을 '당호'라고도 부른다. 나도 멋진 집 지어서 당호 짓고 싶다 ㅜㅜ.... 아무튼! 

 

  ‘수오재라는 이름은 큰형님이 자신의 집에다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이름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이상한 이름이다.

 

 

 내가 장기로 귀양 온 뒤에 혼자 지내면서 잘 생각해 보다가, 하루는 갑자기 이 의문점에 대해 해답을 얻게 되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렇게 스스로 말하였다.

 

 정약용은 남부럽지 않은 긴 유배의 역사를 가진 분이다. 그런 그의 첫번째 유배지가 장기다. 유배 이유는? 종교. 서학쟁이, 천주교 신자라서. ( '신유박해' 라 부른다. 천주교 신자들을 그냥 두었다가, 신유년에 급 단속, 처벌한 사건.)

 아래 사진, 파란 표시 부분이 장기.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정원의 여러 가지 꽃나무와 과일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혔다. 내 책을 훔쳐 없앨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에 있는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으랴. 그러니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어도 떠나간다.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며, 눈썹이 새까맣고 이가 하얀 미인의 요염스러운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라서,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으리오.”

 

  다른 소유물은 도망가지 않지만, 오직 '나'는 제 마음대로 나를 떠나간다. 그러니 나를 지켜야 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 이해가 되시는가?

.... 그러니까, 우리가 제 정신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뭐 이런 이야기.

우리가 지나간 일을 떠올릴 때, '나'는 과거에 돌아가 있다. 우리가 미래의 일을 그릴 때, '나'는 미래에 있다. 우리가 .... 뭐, 그런. 


'일정한 법칙' 없이 '드나드는' '나'는 육체의 나는 당연 아님. 내면의 나?

 우리가 흔히 '내면의 나'라고 하면 그게 진짜 '나'이고, 뭔가 영적이고 신통방통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글을 보라. 이 내면의 '나'라는 애가 넋이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 유배란, 그런 것인가? 아님, 이 내면의 '나'는 불완전한 존재인가?

 유교에서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안의 나라고 해서 완전한 존재도 아니고, 신성하달 것도 없고, 아무튼 우리가 막 숭앙할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진짜 찾으려 노력하는 참나는 아닌 것이다. .... 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잃어버렸던 자. 어렸을 때에 과거가 좋게 보여서, 십 년 동안이나 과거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처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십이 년 동안이나 미친 듯이 대낮에 커다란 강을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새재를 넘게 되었다. 친척과 선영을 버리고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서 숨도 쉬지 못하면서, 나의 발꿈치를 따라 이곳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느냐? 여우나 도깨비에 홀려서 끌려왔느냐? 아니면 바다귀신이 불러서 왔느냐. 네 가정과 고향이 모두 초천에 있는데, 왜 그 본바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이제 정약용은 자신이 '나'를 잃어버렸던 경험에 대해 말해줌.

😢 과거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잃었고,
😎 조정에 나아가 벼슬아치로 정신없이 뛰면서 나를 잃었고 ( 사실은 이때 기중기 제작해서 수원성도 짓고.... 그래도 개인사에서야 '나'를 잃은 시간인 것도 사실이겠죠.... 모순이 넘치는 세상 ),
🤦‍♀️ 그러다가, '한강을 건너(서울을 떠나게 됨) 새재를 넘'어 유배를 가게 된 정약용!

그리고 쭈욱 나를 떠나 정신 못차리던 '나'라는 녀석은 그제야!!! 유배지에 가게 되어서야!!! 나에게 돌아왔으니, '나'는 고향으로도 가지 않고, 이제야 나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사진 김기현, 수원성_1094 / 공유마당 

 

 그러나 나는 끝내 멍하니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곳에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붙잡아 이곳에 함게 머물렀다. 이때 내 둘째 형님 좌랑공도 나를 잃고 나를 쫓아 남해 지방으로 왔는데, 역시 나를 붙잡아서 그곳에 함게 머물렀다.

 

 오직 나의 큰형님만이 나를 잃지 않고 편안히 단정하게 수오재에 앉아 계시니,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서 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큰형님이 그 거실에 수오재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일 것이다.

 

 맹자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크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이 진실하다. 내가 스스로 말한 내용을 써서 큰형님께 보이고, 수오재의 기로 삼는다.

 

원래 '수오재'는 정약용 큰형님이 지은 집 이름 (집도 짓고, 집 이름, 그러니까 당호도 짓고).... 
그래서인지, 정약용은 형제들 이야기도 꺼내는데, 실은 정약용 작은 형도 종교 문제로 유배..... 그런데 이 작은형님이 바로 바로 그 유명한 '자산어보'를 유배지에서 쓴 정약전..... '자산어보'는 국내 최초 어류 도감. 영화로도 나왔다.)

아무튼, 종교 때문이든 무엇때문이든, '나'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는 정약용 형제... 그리고 오직 큰형님의 현명함에 감동하며, 그 현명함을 보여주는 당호에 박수를 짝짝 치며, 수오재기를 씀.

 

자산어보 필사본 / 정약전 초상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다산초당, 연지 / 강진 / 문화재청 _ 정약용은 장기에 있다가 강진으로 유배지가 변경됨.

반응형